지난 6월, 집에서 여행용 가방에 갇히는 등의 학대를 당한 9살 아동이 끝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부모의 학대를 피해 맨발로 집에서 탈출한 9살 아동이 집에서 1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이러한 사건들 이후 정부는 대책의 일환으로 '민법'상의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겠다고 발표했다.
민법 제915조(징계권)는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해당 조항이 그동안 아동학대 가해 부모들이 자신들의 학대 행위를 훈육 행위로 포장하는 면피용으로 애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삭제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 아동학대 사건에서 법원이 '훈육' 목적의 체벌이었다는 학대 부모의 주장을 해당 조항을 근거로 하여 인정, 감형한 판례들이 존재한다. 이번에 발생한 두 사건 또한 어김없이 부모들은 훈육 차원의 행동이었다고 진술했다.
체벌과 학대 사이의 구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해당 징계권 조항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체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현행 법령들은 아동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고 있다. 한국이 1991년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어떠한 아동도 고문 또는 기타 잔혹하거나 비인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1996년부터 아동에 대한 체벌을 고문으로 규정하고 체벌 금지를 권고해 왔으며, 작년 10월에도 "당사국 영토 내 모든 환경의 법률 및 관행 상의 "간접체벌" 및 "훈육(징계)적 처벌"을 포함한 모든 체벌을 명시적으로 금지할 것"을 재차 권고한 바 있다.
2015년에 개정된 아동복지법은 "아동의 보호자는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2012년 제정된 서울 어린이·청소년 인권 조례 또한 "보호자는 양육하는 어린이·청소년에게 체벌을 포함한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폭력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재 여러 형태의 징계권 삭제 민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으나, 그중 여러 안에는 "필요한 훈육을 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 징계권 대신 들어가 있다. 아동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는 다른 현행 법령들에도 불구하고 민법상의 징계권 조항이 '훈육상의 체벌'의 빌미가 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정안의 '훈육권'은 그저 징계권이 이름만 바뀐 채 유지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본질적으로 체벌은 정도의 차이 없이 고문 행위이다. 상대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내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할 때까지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어떻게 포장해도 결국 고문이자 학대 행위일 뿐이다. 체벌과 학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정당한 훈육과 지나친 학대의 기준이나,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부모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교사 등이 아동에게 가하는 이 고통이 아동을 위한 '사랑의 매'라는 헛소리는 이제 그만 역사 속으로 보내줄 때가 되었다. 나는 맞으면서도 멀쩡히 컸다고, 내 자식을 때리며 키워도 잘 자랐다고 해서 체벌을 옹호할 이유는 없다. 어디까지가 정당한 체벌이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학대인지와 같은 기만적인 논의를 벗어나자.
7월 29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2014년 1만7791건에서 지난해 4만1389건(추정치)으로 6년 새 2배 이상 늘었으며, 신고 이후 학대로 최종 판단된 건수 역시 2014년 1만27건에서 지난해 3만45건으로 3배나 급증했다. 이는 제도 및 인식의 개선으로 그동안 신고되지 못하던 아동학대 사건들이 드러난 것일 수 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아동학대 사건들을 고려한다면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아동학대 사건들의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가정과 학교에서 체벌이란 이름의 학대를 받는 아동들의 존재를 직시해야 한다. 징계니 훈육이니 하는 기만적인 단어는 결코 아동 당사자의 권리를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아동에 대한 모든 체벌은 근본적으로 학대이며, 더더욱 심한 학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그 어떤 가벼운 체벌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징계권 조항은 하루빨리 완전히 삭제되어야 하며, 모든 아동에 대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
체벌 금지와 어린이·청소년인권법이 필요하다
체벌 금지가 법으로 명시되어 있음에도 아동학대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징계권 조항이 삭제된다고 해서 당장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징계권 조항에는 아동을 스스로의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부모의 소유물이자 부모 마음대로 그 처우를 결정할 수 있는 귀속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법률의 존재는 '부모가 애들 좀 때릴 수 있지'와 같은 안일한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아 왔다.
이러한 시각이 반영된 법률들이 남아 있는 한, 현행법이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해도 되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달하는 한, 아동을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부모의 소유물로 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양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고방식하에선 아무리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아동학대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훈육을 핑계로 하는 체벌과 학대는 근절될 수 없다. 부모의 자녀 징계권 조항이 떡하니 법에 박혀 있는 현실과 매년 수만 건씩 발생하는 아동학대 사건들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징계권 폐지에서 더 나아가 아동과 청소년을 부모에 귀속된, 주체적인 권리를 가질 수 없는 미성숙한 존재로 바라보는 여타의 법률 조항들도 개선이 필요하다. 징계권 조항을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체벌을 금지한다는 명확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또한 어린이·청소년을 자신의 온전한 권리의 주체로 정의하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기본법으로서 '어린이·청소년인권법'의 제정도 시급하다. 민법을 포함한 현행법들은 나이 어린 존재의 기본적인 권리를 제대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부모나 보호자의 소유물 취급을 하며 어린이·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하고 통제할 뿐이다.
낡은 법률에 담긴 잘못된 인식이 수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아동학대 피해자를 발생시키고 있다. 1958년 민법이 최초 제정될 때부터 존재하던 징계권 조항의 폐지가, 낡은 법률들을 고쳐나가고 어린이·청소년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구제할 새로운 법률 제정의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August 09, 2020 at 02:22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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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라는 헛소리, 이젠 보내줄 때다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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