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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ne 12, 2020

[조선왕실의 취향] 공주의 옥잔에 장식된 용… 술 마시면 죽는 벌레가 되다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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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20> 고급 수입 공예품 옥잔 
영조의 딸인 화유옹주의 무덤에서 출토된 ‘옥제쌍이잔’. 높이가 하나(왼쪽 사진)는 6.7㎝, 다른 하나는 3.1㎝다. 18세기 왕실 부장품 중 국내에 남아 있는 옥잔은 현재 이 두 점이 전부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영조(재위 1724~1776)의 열 번째 딸인 화유옹주(和柔翁主ㆍ1740~1777) 무덤에서 은제주전자, 은제담배합, 휘녹석 벼루, 옥제비녀, 유리제병, 옥제쌍이잔(玉製雙耳盞), 분채병, 청화백자잔 등 매우 다양한 종류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도 두 점의 옥제쌍이잔은 18세기 다른 왕실 일원의 부장품 구성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물이다.

두 옥잔(또는 옥배(玉杯))에는 동물 모양 손잡이가 양쪽에 대칭형으로 달려 있는데, 얼핏 보면 물고기 모양 같기도 하고 용 모양 같기도 하다. 이 동물은 중국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뿔이 없는 용의 한 종류로 ‘이룡(螭龍)’이라 칭해지는 상서로운 존재이며 중국 공예품에 자주 보이는 것이다. 이룡은 본래 3, 4개의 발가락으로 이루어진 네 발, 그리고 양 갈래로 갈라져 둥글게 말리는 긴 꼬리가 특징이나, 이 잔들에는 다리가 생략되고 꼬리가 짧게 표현되어 단순화된 형태로 장식되었다. 이룡문은 중국 고대부터 청대 이후까지 황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애호되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신성하게 여겨졌던 본래의 상징성이 축소되면서 단순한 장식 문양으로 변화되었다.

두 점의 옥잔은 재질, 크기, 조형, 장식 문양 등 전반적인 요소들을 살펴볼 때, 중국 명대(1368~1644)와 청대(1644~1911)에 성행한 ‘옥제쌍리이배(玉製雙螭耳杯)’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화유옹주 묘 출토 옥잔 두 점과 매우 유사한 예로, 청나라에서 제작된 마노(瑪瑙)로 만든 쌍이잔, 돌출된 원점 형태인 유정문(乳釘文ㆍ중국 고대 옥벽(玉璧)과 옥규(玉圭) 등에 표현되었던 문양으로, 하늘의 별을 상징함)을 장식한 쌍이잔을 들 수 있다.

청나라 황실에서 사용되었던 ‘마노쌍리이배’(왼쪽 사진)와 ‘옥제유정문쌍리이배’.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화유옹주 묘는 옹주의 남편인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ㆍ?~1802)과의 합장묘이므로, 부장품의 하한시기를 1777년부터 1802년까지로 볼 수 있다. 옥잔을 비롯한 분채병, 녹색유리병, 청화백자잔 등 부장품의 일부는 청나라에서 제작되어 청나라를 자주 다녀왔던 남편 황인점에 의해 청 황실의 증여 또는 사행무역을 통해 조선에 유입되었다고 추정되는 것들이다. 황인점은 1776년(정조원년)부터 1793년까지 사신의 신분으로 총 여섯 차례 청나라 수도에 방문하였는데, 두 점의 옥잔은 청 황실로부터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신축진찬의궤’(1901)에 그려진 ‘옥배’ 도설(왼쪽 사진)과 ‘영정모사도감의궤’(1901)에 그려진 진전 제3실 다례용 ‘진옥잔’ 도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화유옹주 묘 출토 옥잔과 같이 명ㆍ청대에 유행한 ‘옥제쌍리이배’가 조선 후기 왕실 연회와 진전 제향 의례에서 사용되었음을 의궤에 그려진 도설로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1892년(고종 29) 고종(재위 1863~1907)의 망오(望五ㆍ41세)와 즉위 30주년을 축하하는 ‘임진진찬의궤(壬辰進饌儀軌)’, 1901년(광무 5) 헌종의 계비인 명헌태후(明憲太后ㆍ1831~1903)의 망팔(望八ㆍ71세)을 기념하는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 1902년(광무 6) 고종의 망육순(望六旬ㆍ51세)을 기념하는 ‘임인진연의궤(壬辰進饌儀軌)’에는 전부 간략화된 이룡이 양 손잡이로 장식된 ‘옥배’가 그려져 있으며, 옥배와 함께 다섯 꽃잎 모양 은받침인 ‘은대(銀臺)’가 구성되어 있다.

또한 경운궁 선원전(慶運宮 璿源殿)에 모실 선왕(태조ㆍ숙종ㆍ영조ㆍ정조ㆍ순조ㆍ문조ㆍ헌종) 일곱 명의 어진(御眞)을 모사한 행사에 관한 기록인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摹寫都監儀軌)’(1901)에도 이룡이 손잡이로 장식된 옥잔이 실려 있다. 이 의궤에는 진전(眞殿)인 선원전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예기(禮器)가 세밀한 채색 도설로 묘사되어 있는데, 다례(茶禮) 때 봉안되는 ‘진옥잔(眞玉盞)’ 5종 중 제2, 5, 6실에 올리는 진옥잔과 제3실에 올리는 진옥잔이 이룡 쌍이잔에 해당된다. 각 봉안실에 비치되는 이룡 쌍이잔은 두 종류로서 잔의 기형과 문양에 서로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푸른빛을 띠는 옥으로 제작되었고 금으로 만든 뚜껑과 옥으로 만든 잔 받침이 갖춰져 있다.

‘영정모사도감의궤’에 기록된 ‘진옥(眞玉)’이란 어떤 옥을 뜻하는 것일까? 1444년(세종 26) 세종(재위 1418~1450)이 승정원에 이르는 내용 중에 진옥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고려 때 원나라 세조에게 옥대를 바쳤더니 원나라 관리가 진옥이 아니라 하여 세조에게 죄주기를 청했으나, 세조는 ‘해외의 사람이 알지 못하고 바쳤으니 무슨 죄가 있느냐며 죄주지 말라’고 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종은 국내에서 산출되는 옥의 품질이 청옥(靑玉)ㆍ백옥(白玉)ㆍ벽옥(碧玉) 등과 다르다고 하면서, 의정부에서 옥 채취를 금하는 명령에 쓴 ‘진옥’이라는 문구를 ‘옥 같은 돌’(似玉之石)로 고쳐, 만약 진짜 옥이 아니더라도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진옥’은 옥 중에서도 품질이 매우 뛰어나고 귀한 옥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나라에서 제작된 ‘청옥제쌍리이배’(높이 5.2㎝). 잔 바닥에 ‘건륭년제(乾隆年製)’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안타깝게도 현재 전해지는 조선왕실 옥잔은 매우 적으며, 화유옹주 묘 출토품 외에 이룡 장식 옥잔이 국내에 실물로 남아 있는 사례 역시 거의 없다. 궁중 전래품으로는 창덕궁 구선원전(舊璿源殿)에서 국립고궁박물관에 이관된 유리건판 사진 중 이룡 쌍이잔 흑백 사진이 한 장 남아 있을 뿐이다. 사진으로 보아 쌍이잔은 마노로 만들어진 재질로 여겨진다. 사진 속 잔이 실물로 존재하지는 않으나, 대신 의궤 등에 묘사된 도설과 명나라와 청나라 황실 기물을 통해 조선 왕실 의례에 사용된 이룡 쌍이잔의 실체를 파악해볼 수 있다.

중국의 옥석 생산지는 굉장히 많고 매장량도 풍부하여 명나라 때부터 옥기 생산이 대규모로 회복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 때 옥 재질이 더욱 우수해졌고 옥 조각 기술은 명ㆍ청대에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에 옥기의 사용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으로 제정되어 엄격하게 규제되었고 왕이나 왕실을 포함한 일부 관직에게만 사용이 허용되었다. 조선 시대에 옥 산지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지만 높은 품질의 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 시대는 전반적으로 옥광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특히 조선 초 세종은 전국의 옥광을 폐쇄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에 공물로 대량의 옥이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옥 채굴을 기피했던 국책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사이에 제작된 ‘청옥제규화형배’(높이 4.5㎝). 잔의 표면을 두 마리의 이룡이 기어오르고 있고 꽃가지가 바깥 바닥까지 감싸고 있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그렇다면 ‘이룡이 장식된 옥잔’이 조선왕실에 전해진 시기는 언제였을까? 현재 문헌 자료로 파악되는 가장 빠른 시기는 15세기 전반경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조찬한(趙纘韓ㆍ1572~1631)이 쓴 ‘현주집(玄洲集)’, 그리고 ‘세종실록’에 근거하면, 1418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ㆍ재위 1402~1424)가 ‘꽃가지와 혜호(蟪䗂ㆍ이룡)를 새기고 쪼아서 장식한 옥배’를 1419년 세종에게 전했고, 세종은 다시 이 옥배를 승정원에 하사했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가 선물한 이 옥잔은 지금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명나라 말기 황실 옥잔을 통해 그 형태를 조금이나마 추정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명종(재위 1545~1567)이 옥으로 만든 혜호배(蟪䗂杯)를 독서당에 하사한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에서 “혜호는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 벌레 이름으로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라는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혜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벌레의 이름으로 ‘갈호(蝎虎)’라는 명칭이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수광(李睟光ㆍ1563~1628)이 지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승정원에서 평시에 갈호배(蝎虎杯)를 사용하는데 갈호는 벌레의 이름으로 술을 보면 바로 죽어서 그 형상으로 경계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갈호와 혜호 둘 다 음주를 경계하는 의미를 지닌 동일한 대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 ‘오례의’ 가례 준작 도설에 실린 ‘쌍이갈호청옥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조선시대에 갈호는 도마뱀의 한 종류로 알려져 있었는데, 갈호가 바로 중국의 신수(神獸)인 이룡임을 ‘세종실록’의 ‘오례의’와 ‘국조오례의’의 가례(嘉禮) ‘준작(尊爵)’ 도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준작 도설에 실린 네 종류의 쌍이청옥잔 중 ‘쌍이갈호청옥잔(雙耳蝎虎靑玉盞)’의 양쪽에 부착된 갈호의 모습은 중국에서 다양한 장식 문양으로 애용된 이룡의 모습과 그대로 닮아 있다. 얇은 몸체와 두 갈래로 나뉜 긴 꼬리, 입으로 잔 테두리를 물고 네 발로 잔을 감싸고 있는 형태는 명ㆍ청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룡문의 유형이다.

이처럼 조선왕실에서 ‘옥잔’은 조선왕조실록과 국조오례의, 그리고 의궤 등의 문헌 자료를 통해 주로 특별한 연회나 진전 제향 의례 등에서 술잔 또는 찻잔으로 사용된 사실이 확인된다. 아울러 군신 간 또는 중국 황제와 조선 국왕 간의 하사품으로 쓰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청나라 황실에서 권위와 길상 의미를 지닌 장식 문양으로 즐겨 쓰인 ‘이룡문’은 조선 왕실에서도 공식적인 왕실 행사에 등장할 정도로 선호되었으며, 이룡문이 장식된 쌍이옥잔은 대한제국기까지 당대(堂代) 최고급 기물로 채택되었다.

임지윤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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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3, 2020 at 07:1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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