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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6, 2020

'본명선언' 표절사건, 22년 전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었다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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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점령하기 직전, 영화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킨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바로 2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인 '운파상'을 수상한 <본명선언>(1998, 홍형숙)의 '표절사건'이다. 당시 해결되지 않고 묻혀버린 이 사건을 피해자인 양영희 감독이 <씨네21> 기고문을 통해 다시금 공론화시켰다. <본명선언>을 연출한 홍형숙 감독은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독립다큐멘터리스트다. 그는 이 사건이 불거지기 전까지 <경계도시>, <경계도시2> 등 여러 다큐멘터리로 수상한 경력이 있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었으며, 국내 각종 제작지원 제도를 만들고 심사와 멘토를 역임했다. 또한 국립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오스카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하다.

문화예술계 유명 작가들의 표절 논란은 항상 충격적이지만, 이 경우는 22년 전 피해자가 문제제기 했을 때 납득할 수 없는 절차와 방법으로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와 한국독립영화계가 피해자를 비난하고 이 문제를 덮었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부국제는 "표절 여부 판단을 위해 비교상영회를 열어 달라"는 재일교포 양영희 감독의 요구를 묵살하고 자체적인 심사위원회를 꾸려 "<본명선언>은 도용도 표절도 아니며" 홍형숙 감독의 주장대로 "원본 사용에 둘 사이의 합의가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벽히 뒤바뀐 자세한 이야기는 다큐포럼2020의 입장문을 확인해 주기 바란다.

(다큐포럼2020 입장문 바로가기 ☞ : 클릭)

22년 만에 이 사건이 다시 알려지면서 과거에는 온갖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던 비교상영회가 올해 초 드디어 열리게 되었다. 당시 이 사건을 논란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이나 처음 접하게 된 영화인들이 두 눈으로 두 작품을 확인하면서 영화계의 탄식과 분노가 이어졌다. 표절의 범위(<본명선언>은 <흔들리는 마음>의 3분의 1가량이나 되는 9분 40초를 무단으로 도용했다)도 놀라웠지만, 창작자로서 어겨서는 안 될 종류의 윤리 역시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점까지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시 이 작품에 상을 주고, 심사위원단을 동원해 표절이 아니라고 발표하고, 독립영화계 인사들을 찾아가 이 사건에 대해 함구해 주길 부탁했던 부국제의 조치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씻을 수 없는 이 오욕의 역사에 함께 가담한 책임을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떻게 지고 또 마무리할 것인가.

양영희 감독의 문제제기 이후 6개월이 지난 7월 25일, 드디어 부산국제영화제는 페이스북을 통해 입장문을 게시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입장문 바로가기 ☞ : 클릭)

하지만 22년 만에 다시 쓰인 부국제의 입장문은 한 마디로 '내용 없음'을 '내용 있음'으로 가장한 면피성 쪽글에 불과했다. 여전히 표절을 표절이라 말하지 못하고, 수상 철회는 불가능하며, 피해자에게 (목적어 없는) 사과는 하지만 뒤이어 가해자에게도 사과하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이 입장문은 과오에 대해 책임과 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저항이다. 물론 이 저항은 시대와 양심에 역행하는 저항이다.

양영희 감독의 NHK TV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1996)의 장면
홍형숙 감독의 장편다큐멘터리 ‘본명선언’(1998)에 삽입된 ‘흔들리는 마음’ 장면.

지금 돌아보면 표절사건에 대처한 부국제의 방식은 현재 독립영화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표절을 판단한 심사위원들과, 사건을 은폐시킨 책임이 있는 부국제 관계자, "독립영화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며 양영희 감독을 가해자로 몰았던 독립영화계 단체와 인사들은 20여 년간 오피니언 리더가 되고, 기관장이 되고, 각종 신인의 데뷔와 지원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이 맥락을 보면 부국제의 빈껍데기 입장문 만큼이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독립영화계의 반응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이한 침묵 속에서 현재까지 책임 있는 당사자들 중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표절사건을 은폐시킨 핵심적인 행위자들은 겉으로는 정의롭고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정권에 누구보다 대항하는 블랙리스트의 상징적인 피해자가가 되어 있다) 내부 비판을 받을 때만은 독립영화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피해자 정체성을 내세운다. 국가의 지원금을 따낼 때도 마찬가지의 방법을 쓴다. 22년 전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꿔버림으로써 효과를 보았기 때문일까. 그들에게 질문해보고 싶다. 과연 당신들은 피해자였는가? 당신들은 책임과 판단을 외면하지 않고 활동해온 선배들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며 심하게 부끄러웠다. 당신들은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은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할 주체는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후배들이 아니다. 선배 세대로서 각 단위의 스승, 학자, 감독, 행정가의 자리에 올라 존경받으며 영향력을 끼치는 당신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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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07, 2020 at 07:42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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