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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 읽으며 플라톤 사상에 심취
‘플라톤 대가’ 시블리 교수에게 끌려
직접 편지 보내 토론한 끝에 입학 허가
1967년 미네소타대 ‘정치학’ 박사과정
반전운동 주도 시블리 ‘블랙리스트’에
베트남전 반대 전미교수협회장도 맡아
“박사 논문 지도교수 맡기 곤란” 비상
‘막스 베버’ 전문가 돈 마틴데일 교수
‘과학철학 석학’ 허버트 파이글 교수
그의 제자인 메이 브로드벡 교수 등
‘학문은 어떻게 연구해야 하나’ 배워
박한식 교수는 미국 유학 3년째인 1967년 북미 중서부의 북쪽에 자리한 미네소타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 3년 만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침 그 무렵 미네소타대는 베트남전 반대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고, 그 역시 열정적으로 ‘평화학’의 싹을 키울 수 있었다. 사진은 1955~75년에 걸친 2차 인도차이나반도 전쟁 동안 미네소타대의 학생들과 반전 활동가들이 미 전역의 시위대들과 연대해 거리로 뛰쳐나왔던 기록들이다. 미네소타대 아카이브 갈무리
1967년 가을 나는 박사 공부를 위해 미네소타대학에 입학했다. 워싱턴디시에 있는 아메리칸대학에서 2년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아내와 젖먹이 딸을 데리고 자동차로 17시간을 달려 미네소타대학에 도착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날씨는 내가 나고 유년기를 보냈던 만주 하얼빈의 그것과 흡사하다. 여름 무더위는 없지만 겨울이 길고 춥다. 눈도 많이 오고 종종 어른 키만큼의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미네소타대학에는 항상 두 종류의 지도가 비치되어 있다. 하나는 건물과 도로를 표시한 지상 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 지도이다. 겨울이 워낙 길고 춥다 보니 주차장에서 건물들과 바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지하 지도는 지하도 입구에서 빌딩과 강의실로 연결되는 통로를 표시하고 있는데 마치 중세 수도원의 카타콤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춥고 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박사 공부를 위해 내가 미네소타대학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석사 학위를 밟던 중에 읽었던 한 편의 논문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다. 멀퍼드 시블리 교수가 저술한 ‘더 플레이스 오브 클래시컬 폴리티컬 시어리 인 더 스터디 오브 폴리틱스: 더 리지티메이트 스펠 오브 플라토’라는,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을 명료하면서도 심도있게 서술한 논문이었다. 논문을 읽는 순간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시블리 교수에게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시블리 교수가 바로 미네소타대학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부터 플라톤에 관심이 많았다. 플라톤에 대한 학문적 갈증도 있었지만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평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다. 평화에 대한 갈망은 내가 몸소 겪어온 전쟁의 참상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연재에서도 언급했듯이 나의 조부모님은 망국의 한을 업고 만주로 이주했고 나는 만주사변이 한창이던 1939년 하얼빈에서 태어나 전쟁의 한가운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 이후 잠시 평양에서 소학교를 다녔지만 남북 분단으로 인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왔고 한국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도 목격했다. 또한 전쟁 이후 ‘반공’을 국시로 하는 한국에서 평생을 빨갱이로 매도당하는 고초를 겪으며 변변한 일자리 하나 가지지 못했던 아버님을 보면서 평화에 대한 열망을 키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서울대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사상을 깊이 공부하고자 미네소타대 정치학과 대학원의 박사과정을 선택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대표 저서 ‘국가론’은 보통 ‘국가 혹은 정의에 대하여'라고도 한다. 플라톤이 교사 시절인 중년기에 쓴 것으로, 전체 10권이다. 책 표지의 사진은 1897년 이집트의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사본에 적힌 ‘국가론’의 일부다. 이 사본에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7세기까지 그리스·라틴 문학 작품들과 그리스도교 관계 문서들이 부분적으로 담겨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서울대 시절 나는 플라톤의 명저인 <국가론>에 심취해 있었다. 2400년 전에 살았던 서양 철학자의 지혜에서 작금의 세상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은 마음에 국가론을 읽고 또 읽었다. 영어로 쓰인 원서로도 읽었고 우리말 번역본도 읽었다. 어려웠다. 플라톤의 사상을 영어로 읽고 이해하기에는 내 역량이 많이 부족했고, 우리말 번역본은 번역에 상당한 오류가 있어 이해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플라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 올바름의 정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지에 대한 논의가 풍성하고 심도있게 서술되어 있었다. 플라톤을 더 깊이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 나를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했고, 플라톤의 대가인 시블리 교수를 찾아낸 것이다. 나는 시블리 교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 소개도 하고 내가 플라톤과 평화에 관심을 갖게 된 연유도 자세히 전달했다. 시블리 교수와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나의 열망을 전했고 플라톤에 대한 토론도 했다. 시블리 교수는 내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몇 번의 서신이 오가는 동안 입학 허가서는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공식적인 확답이 없었다. 무일푼이었던 나로서는 장학금 없이 박사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원래 박사과정은 반학생·반직장인이다. 그리고 박사과정 학생은 논문을 쓰고 학위 공부를 하지만 교수들에게는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일종의 동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박사과정 학생에게 장학금과 함께 매달 소정의 월급이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일리노이주립대학을 비롯한 몇몇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이 있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미네소타대학과 시블리 교수에게 장학금에 관해 재차 문의했고, ‘지금 확답을 줄 수는 없지만 입학하면 장학금과 수업 조교를 할 수 있도록 알아봐주겠다’는 비공식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고심 끝에 미네소타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운 좋게 첫 학기부터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네소타대학에 오자마자 박사 공부에 차질이 생겼다. 시블리 교수가 강의도 하지 않고 박사과정 지도교수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시블리 교수 하나만 보고 미네소타까지 왔는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하던 1967년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시블리 교수는 학계에서도 유명한 평화주의자였고 또 열성적인 반전운동가였다. 그는 ‘
베트남전 반대 전미교수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반전운동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시블리 교수는 원래부터 논란의 인물이었다.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1950년대 초에도 사회주의, 평화주의 같은 이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 탓에 문제적 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기도 했다. 그는 평화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시민 불복종 같은 주제들에 관해 많은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반전운동으로 인해 심적·물리적 여유가 없어서 지도교수를 맡아줄 수 없다고 했다.
박한식 교수는 플라톤 연구의 대가인 멀퍼드 시블리 교수에게 지도를 받고자 미네소타대학 정치학과를 선택했다. 시블리는 베트남 전쟁 반대 전미교수협회의 회장으로 반전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전국를 돌며 순회 강연을 했다. 사진은 미네소타의 중심도시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150년 전통의 아우쿠스부르크대학에서 1965년 시블리 교수 초청 강연을 소개한 안내문이다. 아우쿠스부르크대학 누리집 갈무리
평화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사실 미국에 대한 나의 믿음이 있었다. 미국은 누가 뭐래도 기독교에 근간을 두고 탄생한 국가이다. ‘미국 헌법 수정 1조’에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미국 사회는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여전히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한다. 기독교 정신을 건국 이념으로 세워진 나라라면 전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지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순진한 믿음은 베트남 전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베트남 전쟁은 명문도 실리도 찾아볼 수 없는 미국의 속물적이고 저급한 패권 놀음일 뿐이었다. 나도 시블리 교수만큼이나 베트남 전쟁에 분노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던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선민사상과 미국의 가치로 선과 악을 재단하는 이분법적인 행동양식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를 악마로 규정하고 무력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악마를 제거하는 것이 미국의 도덕적 책무이며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을 이루는 신성한 미션이라는 환상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전쟁을 승리와 패배라는 흑백논리로만 인식하는 미국 문화는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부당함에는 눈과 귀를 닫고 있었다. 미국 정부와 언론은 매일 저녁 미군의 사망자 수와 적군의 사망자 수를 차트까지 만들어 비교하며 마치 스포츠 경기 스코어를 중계하듯 보도하면서 미군 사망자 수가 더 적으니 미국이 전쟁에 승리하고 있다는 선전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베트남 전쟁은 나의 평화 연구에 대한 열정과 열망을 극대화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박한식 교수는 정치학과의 시블리 교수에게 박사 논문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대신 철학과와 사회학과에서 흥미로운 과목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과학철학의 대가’인 허버트 파이글(왼쪽)과 그의 애제자인 메이 브로드벡(오른쪽) 교수에게 도움을 받았다. 1954년도 미네소타대 철학과 교수진 단체 사진. 사진 미네소타대학 누리집 갈무리
시블리 교수와 함께 연구할 수 없는 상황은 나에게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평화 연구에 대한 나의 열망과 고집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치학과에 있는 모든 교수들을 둘러봐도 시블리 말고는 플라톤과 평화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교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그 시절 정치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던 ‘행태주의’ 접근 방법을 신봉하고 있었다. ‘길을 찾아서’ 13회에서 언급했듯이 행태주의를 통해서는 내가 염원하는 ‘평화병의 지적 처방’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인접 학문을 하는 교수들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고 사회학과와 철학과에서 내 학문의 스승이 되어줄 2명의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한 분은
돈 마틴데일 교수였고 다른 한 분은
허버트 파이글 교수였다. 사회학 이론을 전공하는 돈 마틴데일 교수는 막스 베버 연구로 유명한 학자였다. 여러 편의 막스 베버 논문과 저서를 영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막스 베버의 수제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베버 연구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다. 마틴데일 교수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막스 베버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막스 베버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행태주의 풍조에 젖어 있던 당시의 학풍에서 인간 행동과 사회 현상을 문화적 접근 방법으로 조명했던 베버의 통찰력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것은 과학철학이었다. 과학철학은 과학의 방법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추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이며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라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저명한 과학철학의 대가인 허버트 파이글이 철학과에 있었다. 파이글 교수는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1930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였다. 논리 실증주의로 대표되는 빈(비엔나) 학파의 초창기 회원으로도 유명했다.
미네소타대 철학과의 허버트 파이글(왼쪽) 교수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논리 실증주의’를 주창한 비엔나 학파의 초창기 회원으로도 유명했다. 1930년대 비엔나 학파의 리더인 모리츠 슐리크(오른쪽)와 함께한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금 돌아보면 그를 만난 건 나에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파이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틈나는 대로 찾아가 토론하고 끝없는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던졌다. 파이글과 그의 제자였던
메이 브로드벡의 강의를 수강하면서 나는 학문이라는 것은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과학철학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3년간의 박사 공부를 마치고 나니 과학철학으로서 정치학 방법론을 나 나름대로 모색할 수 있는 학문적 지식과 관점을 갖출 수 있었다. 차후 연재에서 상세히 서술하겠지만, 학위를 마친 뒤 나는 조지아대학에 과학철학과 정치학 방법론 강의를 담당할 교수로 임용되었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지낸 3년간의 박사과정은 내 삶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정말 공부도 열심히 했고 책도 많이 읽고 다양한 시각도 두루 접했다. 과학철학, 사회학, 사회심리학, 그리고 정치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닥치는 대로 듣고 공부했다. 석사 학위 학점을 인정받아서 총 90학점만 이수하면 되는 박사과정에서 나는 3년 동안 자그마치 120학점을 이수했다. 박사 공부는 내 평생 학문의 토대가 되어주었고 연구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 미국에서 50년 넘는 세월을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한국 유학생을 보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이 목적의식 없이 유학을 나오고 단순히 학위 취득 목적만을 위해 20대의 황금 같은 시기를 허비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오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무엇을 공부하기를 원하고, 왜 공부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기를 당부하고 싶다. 나는 평화 연구를 정치학 테두리 안에서만 해야 한다는 짧은 소견에서도 탈피할 수 있었다. 정치학에서 전쟁학을 연구할 수는 있다. 전쟁의 원인을 고찰하고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늘 강조했듯이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니다. 평화는 이질성의 조화이며, 평화 연구는 이질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학문이다. 남북한의 평화 통일도 이러한 견지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에 진정한 평화 연구를 위해서는 인접 학문과의 학제 간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시블리 교수와 함께 연구할 수 없었던 상황은 나에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시블리가 지도교수가 되었더라면 아마도 평생을 플라톤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학문의 은사이자 스승이었던 마틴데일 교수와 파이글 교수는 이미 오래전에 작고했다. 박사과정 내내 따뜻하게 나를 대해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타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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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0, 2020 at 07:57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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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반전운동 기지' 미네소타에서 '평화학' 초석 다졌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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