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네임·기억하는 몸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 18세기의 방: 공간의 욕망과 사생활의 발견 = 민은경 등 27명 지음.
한국18세기학회에서 활동하는 인문학자 27명이 18세기 방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를 탐구한다. '18세기의 맛', '18세기 도시'에 이은 이 학회의 세 번째 책으로, 포털에 연재됐던 내용을 재정리해 엮었다.
서양에서 집이 사생활을 보장하는 안락한 공간으로 재정의된 것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다. 개인 공간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종류의 방이 배치됐고, 이에 따라 새로운 가구와 물건이 인기를 끌게 됐다.
제인 오스틴은 응접실 창가 작은 탁자 위에 아버지가 선물한 '글쓰기 상자(writing box)'에서 글을 썼다. 프랑스에서 수입된 '화장방'은 17세기 말부터 영국에 유행하기 시작했고 조너선 스위프트가 1732년 발표한 시 '귀부인의 화장방(The Lady's Dressing Room) 등 문학작품과 그림의 소재가 됐다.
18세기 들어 영국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벽난로는 연기와 그을음을 처리하고 열효율을 높이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집안의 안락함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벽난롯가에서 책을 읽는 습성이 퍼지게 되는데 당대의 일부 문호들은 이를 부적절한 쾌락으로 연결해 우려하기도 했다.
수세식 화장실은 하수도 시스템이 정비된 18세기 말에 가서야 실용화되고 그 이전에는 옥외 화장실을 꺼리는 상류층이나 여성들은 침실용 요강과 좀 더 발전된 형태인 의자형 변기를 사용했다.
18세기 유럽의 방은 중국풍 가구와 인도산 면직물, 오스만 제국의 카펫 등 온갖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물건들로 가득했다. 이는 식민지 개척, 세계 교역의 활성화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애완동물 기르기가 유행했던 것도 이 시기였는데, 식민지의 슬픈 산물이라고 할 흑인 시동을 '애완동물'의 일종으로 여겼음을 당대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주인의 초상화나 가족 초상화에 절대 등장하지 않는 다른 하인들과 달리 흑인 시동은 애완견, 원숭이, 앵무새와 함께 '애완동물'의 하나로 그림에 나타난다. 흑인 시동이 한결같이 개 목걸이를 연상시키는 은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책은 문학, 역사, 미술·디자인·조형, 도시·건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주로 18세기 서양의 방을 둘러보지만, '조선 시대 상층 여성의 거주공간과 삶', '선비의 공부방이자 놀이터였던 사랑채', '청대 귀족의 실내 풍경과 가구', '일본의 도코노마와 장식용 선반' 등과 같은 한국과 아이사 국가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문학동네. 440쪽. 2만5천원.
▲ 디어 마이 네임 = 샤넬 밀러 지음, 성원 옮김.
미국에서 '미투' 운동의 불을 댕긴 2015년 스탠퍼드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그 사건과 그 이후의 날들에 관해 털어놓는다.
파티에서 만취해 의식을 잃은 저자를 성폭행한 브록 터너는 '완벽한 유죄'였다. 목격자들이 있었고 현장에는 증거가 널려 있었으며 도주하다 붙잡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1년 반 동안 이어진 재판에서 '화장실에 숨어 있고 싶을 만큼' 수치심과 고립감을 느껴야 했던 것은 피해자였고 유명한 수영 선수였던 가해자는 고작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나마 3개월이 감형됐다.
그러나 저자인 피해자가 법정에서 최후 낭독한 의견 진술서가 인터넷과 SNS를 통해 퍼지면서 반전이 찾아왔다. 진술서가 공개된 지 4일 만에 1천100만명이 읽었고 의회는 낭독회를 열었으며 진술서는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됐다. 담당 판사는 파면당했다.
2019년 '에밀리 도'라는 가명으로 진술서를 썼던 저자는 진짜 이름을 내걸고 더 크고 깊은 뒷얘기를 책으로 냈다.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사건 이후 일상이 어떻게 뒤죽박죽이 돼가는지, 쉽게 말하는 '치유'가 실제로는 어떻게 가능한지, 다른 범죄에서와 달리 이름을 갖추고 살아가는 성폭력 피해자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통과 유머를 교차해 가며 기술한다.
말미에 '에밀리 도의 피해자 의견 진술서' 전문을 실었다.
동녘. 544쪽. 1만9천800원.
▲ 기억하는 몸 = 이토 아사 지음, 김경원 옮김.
신체와 장애의 문제를 깊이 연구해온 저자가 장애인 11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를 토대로 신체장애와 기억의 연관성을 추적한다.
한 사람이 하나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저자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한 사람의 몸이 마치 여러 개로 중첩된 듯 기능하는 독특한 현상을 발견해내고 이를 '하이브리드 신체' 혹은 '몸의 복수화'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후천적 장애인의 몸에는 종종 장애를 입기 전 몸과 현재의 몸의 기억이 겹쳐져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현상이 일어난다. 예컨대 저자가 인터뷰했던 시각장애인은 말하면서 언제나 메모하는 습관을 유지한다. 단지 필기구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금 전에 글씨를 썼던 곳으로 되돌아가 강조하는 의미로 동그라미를 치거나 밑줄도 긋는다. 저자는 그가 손의 운동 기억을 단지 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보고' 있다고 설명한다.
선천적 장애인에게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이분척추증으로 하반신에 감각이 없는 장애인은 생리적으로는 발에 통증을 느낄 수 없지만, 발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면 마치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저자는 장애인들의 이 같은 모습을 지켜보면서 몸과 기억에 관한 관점을 재정립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기억에 대한 규정은 다양할 수 있지만, 본인과 더불어 존재하면서 본인의 의지를 초월해 작용한다는 점은 어떤 경우에든 공통적이다"라고 썼다.
현암사. 296쪽. 1만6천원.
cwhyn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20/06/29 10:41 송고
June 29, 2020 at 08:41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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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18세기의 방: 공간의 욕망과 사생활의 발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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